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외인부대 (문단 편집) === 식민지 전쟁 === 2차 대전 직후 프랑스 식민지 각지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나치 독일군에 몸 담았던 군인까지 대거 받아버렸다. 아예 포로수용소에서 모병을 하기도 했다. 이 때문에 나치 독일과 싸우던 프랑스 외인부대가 나치 전범들의 소굴이 되어버리기도 했다. 프랑스 외인부대를 대표하는 말이 '과거는 물어보지 않는다'로, 이 때문에 외인부대원이 [[철십자 훈장]]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하였다. 사실 프랑스쪽도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, 몇 년동안 러시아에서 구르며 짬밥이 쌓인데다가 인도차이나에서 총 맞고 죽어도 별 문제가 없는 한스들을 식민지 전쟁에 밀어넣으면 그 대신 프랑스의 앙리와 샤를이 본국에서 전시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. 이렇게 받아들인 독일군 출신들은 약 20,000에서 30,000여명 규모였는데, 1950년에는 독일인이 부대에 너무 많다고 외인부대에서 독일인 자원자를 거절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. 이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, 알제리 등지에서 소모됐다. 이들은 [[판처리트|하얀 케피]]나 [[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|외인부대는 전방으로 행군한다]] 같은 흥겨운 독일 가락들을 프랑스에 전파하기도 했는데, 프랑스 외인부대 특성상 박자가 매우 느려졌다. 프랑크 비스(Frank Biess) 교수에 따르면 [[https://daily.jstor.org/ok-recruiter-the-legion-is-coming/|이러한 현상은 서독인들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도 했지만 그 중에는 부정적인 관심도 많았다고 한다.]]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할 젊은이들이 [[식민지인 부대|프랑스군의 모로코인이나 흑인들]]처럼 프랑스의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이권을 위해 죽어나거나 동성애에 오염될까[* 독일인 외인부대 알선자들이 동성애적인 방법으로 모병자를 끌어들였다는 주장이나 외인부대는 성적으로 퇴폐적인 곳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, 이런 주장은 전통적 가족상에 기반해 재건 중이던 전후 서독 사회에 큰 공포로 다가왔다고 한다. 여기에 외인부대 알선자들은 전직 외인부대 복무자라는 인식 때문에 두 주장이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까지 했다.] 걱정했기 때문. 이 때문에 1953년부터 1957까지 독일인이 다른 독일인을 외국군이나 그와 비슷한 조직에 알선하는 것은 독일 형법 141조로 불법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